12월 법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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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경우스님 작성일11-12-28 10:36 조회4,135회 댓글0건본문
몹시도 추운 요즘입니다. 추울 때는 추운 곳으로 가고, 더울 때는 더운 곳으로 가라는 옛 스승의 말이 있습니다. 이 뜻은 삶 자체 바로 그것이 되어 살아가라는 뜻인 듯 싶습니다. 이 추운날 이렇게 좋은 분들과 함께 할 수 있음이 다시 한번 기쁘고 감사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가끔 절에 무엇 하러 가느냐는 질문을 받으시지 않는지요? 그런 경우 어떻게 대답을 하십니까? 이러한 때 여기 계신 우리 불자님들은 뚜렷한 목적의식이 있어야 합니다. 불법을 만나고 기도하러 바로 여기 이 자리에 계신 것입니다.
사람들은 서로간의 어떠한 만남에 의해 형성되어 갑니다. 그 상대가 사람이든 사상이든 또는 종교든 그러한 만남으로 인해 인간은 눈을 뜨고 생각의 영역도 깊어지고 넓어집니다. 서로 알지 못했던 우리들이 오늘 이 자리에 만나게 된 것은 부처님 가르침 바로 불법 덕분입니다. 이해타산으로 얽히고 설킨 관계가 아닌 순수한 믿음의 길에서 만난 벗이며, 같은 가르침과 자기완성을 위해 노력하는 도반들입니다. 생각할수록 고마운 인연입니다.
오늘은 아기예수가 탄생한 성탄절이기도 합니다. 어떠한 종교를 만나느냐에 따라 시끄럽고 혼란스런 이 세상에서 자기를 바로 볼 수 있는 인생관이 자리하게 됩니다. 지금 이 자리에 있는 우리는 부처님과의 만남을 통해 각자 삶의 인생관이 자리 잡히고 삶의 지혜를 찾게 된 사람들입니다. 순간 순간 살아가면서 끊임없는 물음을 지녀야 합니다. 무엇을 위해 살고 있는지, 과연 이 생을 후회 없이 보내고 있는지 물어야 합니다.
누구에게나 하루 24시간이 주어지고 밤과 낮, 사계절이 있고 그 안에 각자 삶의 의지를 가지고 살아갑니다. 산중에서 살든 마을에서 살든 살아간다는 것은 같습니다. 그 주어진 순간과 시간들을 어떻게 사는가가 삶의 질과 행복의 정도를 결정합니다.
불교 수행에는 두 가지 길이 있습니다. 하나는 지혜의 길이고, 또 하나는 자비의 길입니다. 지혜는 자기 형성의 길이며, 자비는 이웃에 대한 보살핌의 길입니다. 어느 한 가지라도 결여되면 그것은 불교가 아닙니다. '위로는 깨달음을 구하고, 아래로는 중생을 구제한다. 상구보리 하화중생' 가르침은 이러한 의미에서 나온 말입니다. 우리의 본래마음에는 지혜와 자비의 요소가 동전의 양면과 같이 함께 갖추어져 있습니다. 진정으로 지혜를 갖추고 있고 체험하였다면 그것이 바로 자비로 전환되어야 합니다.
이러한 깨달음의 체험은 찻잔의 손잡이를 들어 올리는 것과 같습니다. 손잡이를 잡고 들어 올리면 찻잔도 들어 올려집니다. 지혜라는 손잡이를 들어 올리면 자비의 마음 역시 세상에 드러납니다. 수행만하고 베풀지 않고 혼자 가만히 있다면 그것은 옳지 않습니다. 수행의 향기가 바람에 날아가야 합니다. 그것이 나눔이고 인간에 대한 배려입니다. 그것이 부처님이 한 일이고 예수님이 한 일입니다. 맛있는 음식이 있으면 가까운 사람들을 불러 같이 먹고 싶습니다. 저절로 그렇게 되는 그 마음이 정상적이고 또한 온전한 우리의 본마음 입니다.
보리수 아래서 새벽별을 보시고 깨달음을 이룬 뒤 부처님은 몸소 제자들을 찾아 나섭니다. 이것이 대자대비입니다. 곧 자비의 실천입니다. 스스로 찾아 나서서 행한 부처님의 설법에 의해 불교가 시작되었습니다. 만약 이러한 자비마음이 없었다면 불교는 세상에 존재되지 못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늘 가르침 속에서 다른 존재들과 나누어 가지라고 설하고 계십니다. 깨달음의 경지를 혼자서 지키고 누리는 것이 아니라 필요한 이웃에게 전해줍니다. 이러한 나눔을 통해서 세상에 전파되고 우리들 삶 자체가 변화되어 더욱 충만하고 풍성하게 됩니다.
이 자리에 계신 우리 장경사 신도님들은 과연 자비심을 얼마만큼 지니고 있는가요? 그 자비심을 일상생활에 어떻게 실현하고 있는지요?
초조대사인 달마스님에게 선종의 2대 조사인 혜가스님이 어느 날 묻습니다.
"진리를 깨닫고자 하면 어떤 수행을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겠습니까?" 그러자 달마스님은 "마음을 살피는 이 한 가지 일이 모든 행동을 다 거두어들인다. 세상에서 이 수행이 가장 간단하고 중요하다."라고 답합니다.
이에 혜가스님이 다시 "어째서 마음을 살피는 법이 모든 행동을 거두어들인다고 하십니까?"라고 묻자, 달마스님은 "마음이란 모든 것의 근본이므로, 모든 현상은 오직 마음에 일어난다. 마음을 깨달으면 만 가지 행을 다 갖추는 것이다. 이를테면 큰 나무 한그루가 있다고 하자. 그 나무의 가지와 잎과 열매는 모두 뿌리가 근원이다. 나무를 가꾸는 사람은 뿌리를 북돋을 것이고, 나무를 베고자 하는 사람역시 그 뿌리를 베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현상이 자기 마음에서 일어나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있음으로써 저것이 있고, 이것이 없으면 저것도 없다는 것이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면서 늘 생각해야할 마음가짐이고 삶의 근본 공식입니다. 지혜를 가지고 가족은 물론 이웃과 친척과의 관계에 자비한 마음을 활짝 열어 날마다 좋은날이시길 기원 드립니다. 그렇게 하면 사는 일이 편하고 즐겁습니다. 성불하십시오.
바람이 아니다
<초당선청>
흔들리는 것은 바람이 아니다
깃발도 마음도 아니다
흔들리는 그 길 아득도 하여
찾아 들어갈 길 다 끊어졌다
일어나 사라지는 흰 구름 한 점
본디 없었던 저 흔적
천 길 낭떠러지를 떠난 발길
떨어지고 떨어지고
또 떨어지고.
'바람이 아니다': <선문염송>에 실린 게송이다.
초당선청: 송나라 임제종 황룡파 스님으로 나고 죽은 때를 알 수 없다. 회당조심 스님에게 참학할 때 '바람에 흔들리는 깃발'의 화두를 참구하여 깨달음을 얻었다.
가끔 절에 무엇 하러 가느냐는 질문을 받으시지 않는지요? 그런 경우 어떻게 대답을 하십니까? 이러한 때 여기 계신 우리 불자님들은 뚜렷한 목적의식이 있어야 합니다. 불법을 만나고 기도하러 바로 여기 이 자리에 계신 것입니다.
사람들은 서로간의 어떠한 만남에 의해 형성되어 갑니다. 그 상대가 사람이든 사상이든 또는 종교든 그러한 만남으로 인해 인간은 눈을 뜨고 생각의 영역도 깊어지고 넓어집니다. 서로 알지 못했던 우리들이 오늘 이 자리에 만나게 된 것은 부처님 가르침 바로 불법 덕분입니다. 이해타산으로 얽히고 설킨 관계가 아닌 순수한 믿음의 길에서 만난 벗이며, 같은 가르침과 자기완성을 위해 노력하는 도반들입니다. 생각할수록 고마운 인연입니다.
오늘은 아기예수가 탄생한 성탄절이기도 합니다. 어떠한 종교를 만나느냐에 따라 시끄럽고 혼란스런 이 세상에서 자기를 바로 볼 수 있는 인생관이 자리하게 됩니다. 지금 이 자리에 있는 우리는 부처님과의 만남을 통해 각자 삶의 인생관이 자리 잡히고 삶의 지혜를 찾게 된 사람들입니다. 순간 순간 살아가면서 끊임없는 물음을 지녀야 합니다. 무엇을 위해 살고 있는지, 과연 이 생을 후회 없이 보내고 있는지 물어야 합니다.
누구에게나 하루 24시간이 주어지고 밤과 낮, 사계절이 있고 그 안에 각자 삶의 의지를 가지고 살아갑니다. 산중에서 살든 마을에서 살든 살아간다는 것은 같습니다. 그 주어진 순간과 시간들을 어떻게 사는가가 삶의 질과 행복의 정도를 결정합니다.
불교 수행에는 두 가지 길이 있습니다. 하나는 지혜의 길이고, 또 하나는 자비의 길입니다. 지혜는 자기 형성의 길이며, 자비는 이웃에 대한 보살핌의 길입니다. 어느 한 가지라도 결여되면 그것은 불교가 아닙니다. '위로는 깨달음을 구하고, 아래로는 중생을 구제한다. 상구보리 하화중생' 가르침은 이러한 의미에서 나온 말입니다. 우리의 본래마음에는 지혜와 자비의 요소가 동전의 양면과 같이 함께 갖추어져 있습니다. 진정으로 지혜를 갖추고 있고 체험하였다면 그것이 바로 자비로 전환되어야 합니다.
이러한 깨달음의 체험은 찻잔의 손잡이를 들어 올리는 것과 같습니다. 손잡이를 잡고 들어 올리면 찻잔도 들어 올려집니다. 지혜라는 손잡이를 들어 올리면 자비의 마음 역시 세상에 드러납니다. 수행만하고 베풀지 않고 혼자 가만히 있다면 그것은 옳지 않습니다. 수행의 향기가 바람에 날아가야 합니다. 그것이 나눔이고 인간에 대한 배려입니다. 그것이 부처님이 한 일이고 예수님이 한 일입니다. 맛있는 음식이 있으면 가까운 사람들을 불러 같이 먹고 싶습니다. 저절로 그렇게 되는 그 마음이 정상적이고 또한 온전한 우리의 본마음 입니다.
보리수 아래서 새벽별을 보시고 깨달음을 이룬 뒤 부처님은 몸소 제자들을 찾아 나섭니다. 이것이 대자대비입니다. 곧 자비의 실천입니다. 스스로 찾아 나서서 행한 부처님의 설법에 의해 불교가 시작되었습니다. 만약 이러한 자비마음이 없었다면 불교는 세상에 존재되지 못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늘 가르침 속에서 다른 존재들과 나누어 가지라고 설하고 계십니다. 깨달음의 경지를 혼자서 지키고 누리는 것이 아니라 필요한 이웃에게 전해줍니다. 이러한 나눔을 통해서 세상에 전파되고 우리들 삶 자체가 변화되어 더욱 충만하고 풍성하게 됩니다.
이 자리에 계신 우리 장경사 신도님들은 과연 자비심을 얼마만큼 지니고 있는가요? 그 자비심을 일상생활에 어떻게 실현하고 있는지요?
초조대사인 달마스님에게 선종의 2대 조사인 혜가스님이 어느 날 묻습니다.
"진리를 깨닫고자 하면 어떤 수행을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겠습니까?" 그러자 달마스님은 "마음을 살피는 이 한 가지 일이 모든 행동을 다 거두어들인다. 세상에서 이 수행이 가장 간단하고 중요하다."라고 답합니다.
이에 혜가스님이 다시 "어째서 마음을 살피는 법이 모든 행동을 거두어들인다고 하십니까?"라고 묻자, 달마스님은 "마음이란 모든 것의 근본이므로, 모든 현상은 오직 마음에 일어난다. 마음을 깨달으면 만 가지 행을 다 갖추는 것이다. 이를테면 큰 나무 한그루가 있다고 하자. 그 나무의 가지와 잎과 열매는 모두 뿌리가 근원이다. 나무를 가꾸는 사람은 뿌리를 북돋을 것이고, 나무를 베고자 하는 사람역시 그 뿌리를 베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현상이 자기 마음에서 일어나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있음으로써 저것이 있고, 이것이 없으면 저것도 없다는 것이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면서 늘 생각해야할 마음가짐이고 삶의 근본 공식입니다. 지혜를 가지고 가족은 물론 이웃과 친척과의 관계에 자비한 마음을 활짝 열어 날마다 좋은날이시길 기원 드립니다. 그렇게 하면 사는 일이 편하고 즐겁습니다. 성불하십시오.
바람이 아니다
<초당선청>
흔들리는 것은 바람이 아니다
깃발도 마음도 아니다
흔들리는 그 길 아득도 하여
찾아 들어갈 길 다 끊어졌다
일어나 사라지는 흰 구름 한 점
본디 없었던 저 흔적
천 길 낭떠러지를 떠난 발길
떨어지고 떨어지고
또 떨어지고.
'바람이 아니다': <선문염송>에 실린 게송이다.
초당선청: 송나라 임제종 황룡파 스님으로 나고 죽은 때를 알 수 없다. 회당조심 스님에게 참학할 때 '바람에 흔들리는 깃발'의 화두를 참구하여 깨달음을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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