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라니 수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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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불교대학 작성일11-05-14 11:25 조회3,739회 댓글0건본문
다라니 수행
1. 한 단어 또는 한 문장으로 된 주문을 만트라(眞言 또는 呪)라고 하고, 한 문단 이상으로 된 주문을 다라니(總持)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보통 만트라와 다라니를 통들어 주(呪) 또는 주문(呪文)이라고 일컫습니다. 한국 불교 나아가 대승불교권에서는 다라니 수행을 흔하게 볼 수 있고 모든 불교의식에서 빠질 수 없는 내용입니다.
2. 다라니(만트라)는 원래 인도말입니다. 인도의 고대사상의 근원이랄 수 있는 베다와 우파니샤드의 문헌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신의 언어로 알려져 해석하지 않고 입으로 암송하여 삼매에 들어가는 방편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신의 언어를 이용해야만 소통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다라니를 아는 것과 다라니에 대해 아는 것은 큰 차이가 있습니다. 다라니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있는 것과 다라니의 진의을 파악하는 것은 다르기 때문입니다.
다라니를 암송해야 하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다라니에 대한 연구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다라니를 통해 삼매와 해탈을 얻는 게 중요한 것입니다. 그렇다고 다라니가 아무 의미가 없거나 해석이 불가능한 것은 아닙니다. 다라니만이 신과 소통할 수 있는 유일한 언어라는 점입니다.
3. 불교에서도 이런 전통을 이어받아 우리의 근원자리인 법성(法性) 즉, 법신불, 자성불, 본성, 불성과 일치하는 수단으로 다라니 수행을 권해왔습니다. 특히 대승불교에서 유행하였고 티벳불교에서는 거의 다라니불교라고 할 정도로 발전해 왔습니다.
티벳불교는 무드라(신체적 훈련), 만트라(언어를 통한 훈련), 탄트라(의식을 통한 훈련) 세가지를 내세워 수행시키고 있습니다. 이 가운데 만트라는 입을 통한 비밀수행법입니다. 주로 만트라와 다라니를 암송하여 악업을 맑히게 합니다.
4. 불교에는 현교顯敎(붓다의 가르침을 해석할 수 있는 것)와 밀교蜜敎(가르침을 해석할 수 없는 것)가 있습니다. 현교는 보통 우리가 아는 경전의 가르침입니다.
분석과 이치를 파악하여 붓다의 지혜를 터득하게 하는 가르침입니다. 대개의 경전들이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로 옮겨져 있는 것은 현교이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밀교는 오직 경험과 깨달음으로만 확인할 수 있는 것이라 해석하지 않습니다.
깨달음에 이르는 방편으로 사용하는 것을 목적으로 합니다. 분석과 이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삼매에 드는 것을 강조하기 때문입니다. 하기에 밀교에서는 의미와 분석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오직 수행의 수단으로 사용할 뿐입니다. 그렇다고 밀교의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다라니에는 다라니 특유의 의미가 담겨져 있고 불교의 핵심이 담겨져 있다고 합니다. 그것은 오직 삼매에 들어갔을 때만이 터득할 수 있는 내용입니다. 해석보다도 실천을 강조하는 다라니 수행은 어쩌면 더 불교적일 수 있습니다.
5. 불교는 원래 밀교라는 것이 없었습니다. 붓다께서 <열반경>에 설하셨듯이, 손 안에 감춰진 가르침을 없었습니다. 자신을 등불(섬)로 삼고 법을 등불(섬)로 삼으라는 말씀은 바로 이런 이유에서 였습니다. 자기자신의 의식활동을 관찰하는 것이 불교수행의 근본이고 핵심이었습니다. 즉 자신을 등불로 삼는 길의 번째는 자신의 몸과 느낌과 마음과 의식작용을 세밀히 알아차리는 공부입니다.
이것 이외의 가르침은 곁가지에 지나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6. 그러나 대승불교시대가 되면서 붓다의 비밀스런 가르침이 존재한다고 주장하게 됩니다. 특히 밀교권(티벳, 몽고, 중국)에서 그랬고, 참선을 내세우는 선종(중국, 한국, 일본)에서도 그랫습니다. 범부중생들이 사용하는 언어로는 담을 수 없는 진리가 있다는 것입니다. 다라니는 오직 스승으로부터 전해받아 수행하는 것으로 비밀스럽게 이루졌습니다. 스승과 제자만이 통할 수 있는 코드이기 때문입니다.
7. 불교의 정수를 알기 위해서는 이 코드를 해결하지 않고는 불가능하였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밀교에서는 스승(구루)의 역할과 지위를 중시했던 것입니다. 또한 선종에서도 언어도단(言語道斷) 불입문자(不立文字)를 내세워 이심전심(以心傳心)을 강조하였습니다. 경전 밖의 가르침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오직 깨달음을 통해서만이 검증되는 것으로 견성성불을 강조하였습니다.
밀교에서는 스승이 제자에게 비밀스런 다라니를 전해주었고, 선종에서는 화두를 던져주었습니다. 다라니나 화두를 깨치게 되면 제자는 스승과 아무 걸림이 없이 통하게 되고 스승이 사용하는 모든 어휘와 단어를 이해하게 됩니다. 오직 그들만이 이해 할 수 있는 코드라는 것입니다.
8. 그러면 우리가 알고 있는 다라니와 화두는 무엇일까요? 이것은 밀교(蜜敎)나 선종(禪宗)에서 공개한 다라니입니다. 스승이 제자에게 직접 건네준 비밀스런 다라니 또는 화두가 아니라 누군든지 수지하여 사용할 수 있는 오픈소스입니다. 현재 우리들이 알고 있고 사용하고 있는 다라니가 바로 그것들입니다. 비밀스럽게 전해지던 방식에서 다시 불교적 전통으로 돌아와 공개된 것입니다. 허나 공개된 다라니라 하더
라도 해석보다는 암송하는 목적은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9. 공개된 다라니는 주로 경전에서 나온 것들입니다. 대승의 모든 경전들이 중간이나 결말에 다라니를 곁들이고 있습니다. 팔만대장경을 모아놓은 대장경(고려대장경, 신수대장경, 불광대장경, 등)을 들춰보면 쉽게 알 수 있습니다. 반야심경을 보더라도 '아제 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 사바하'가 끝에 나옵니다. 법화경, 원각경, 화엄경을 보더라도 다라니는 수없이 등장합니다. 티벳불교의 경전들이 아니더라도 쉽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즉 다라니는 인간의 언어로 붓다의 말씀을 옮겨놓는 것으로는 부족해 신비의 언어 그대로 옮겨 놓은 것입니다.
10. 공개된 다라니는 해석하지 않는 것이 상례이지만 해석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인도말인 산스크릿트로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해석된 다라니를 살펴보면 대개 경전의 내용을 함축한 것이거나 기도, 발원, 찬탄, 회향의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11. 한 마디로 우리가 알고 있는 다라니는 붓다의 가르침이거나 보살님들의 가르침입니다. 다라니의 목적이 삼매에 이르는 것이므로 힘들여 해석할 필요없이 암송할 뿐입니다. 다라니는 신의 음성에 어울리도록 이루어졌으므로 소리의 법칙에 적절하게 이루어져 있습니다. 리듬과 소리의 조화가 원만하게 갖춰져 있습니다.
본래 소리는 '공'의 상징입니다. 소리의 생성과 소멸은 공의 이치를 깨치게 하는데 큰 영감을 줍니다. 다라니가 입밖으로 나오는 순간 사라지게 됩니다. 다라니를 암송하면서 공의 이치를 터득하게 되고 소리와 소리가 끊임없이 이어지는 연기의 법칙을 깨닫게 됩니다.
12. 소리 그 자체가 다라니의 생명입니다. 소리가 흐르는 방향을 잡기만 하면 다라니 수행은 한 단계 접어들었다고 할 수 잇습니다. 마치 출렁이는 강물에 뗏목을 띠워 올라타는 것과 같습니다. 뗏목에 오르기만 하면 강물의 흐름과 거슬리지 않고 자유를 만끽하며 저편 언덕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다라니라는 뗏목을 올라타면 인생의 강줄기를 무난하게 건널 수 있다는 신념으로 암송해야 합니다. 다라니 암송의 소리와 하나되어 나와 남이 무너지고 부처와 중생의 경계가 사라진 자리에 들어가야 합니다.
13. 다라니는 중생과 부처, 번뇌와 보리라는 양단의 경계를 이어주는 다리입니다.
다라니를 염송하는 순간 우리들 마음은 부처와 중생의 경계가 사라지는 불이(不二)가 됩니다. 둘이면서 하나가 되는 통일의 장을 만들어 주는 것이 다라니입니다.
그래서 다라니는 신비를 체득하게 하는 힘이고, 지혜를 갖게 하는 묘력이며, 견줄수 없는 능력을 가져다 주는 양약입니다.
14. 어떤 다라니라 하더라도 상관 없습니다. 일단 자신의 마음에 영접했다면 기쁜 마음과 흔들림없는 마음으로 저어가야 합니다. 소리 소리마다 모든 부처님과 보살님들의 찬탄을 들으며 함께 가야 합니다. 한번 삼매의 맛에 길들이면 그때가 지고지순의 기쁨입니다. 그 이상 이하의 행복은 없습니다. 가장 귀한 기쁨을 얻는 행복의 비밀은 바로 다라니 삼매를 체험하는 일입니다.
15. 다라니, 다라니, 다-라니 많이 하십시오.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가장 쉬운 방법으로 가장 큰 힘을 얻을 수 있는 수행법입니다. 우리나라는 신라시대때부터 명랑법사가 유행시켜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특히 천수경에 나오는 신묘장구 대다라니는 한국불교의 대표적인 다라니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관세음보살께서 세상에 공개한 다라니들이 천수경과 기타 경전에 많이 나와 있습니다. 그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 신묘장구대다라니와 육자진언입니다.
16. 한국불교를 참선, 밀교, 정토 이렇게 세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잇습니다. 이 세가지는 하나로 통합되어 한국불교 특색으로 자리잡았습니다. 참선과 밀교가 통합하여 선밀일치(禪蜜一致)를 주장하였고, 참선과 정토가 통합하여 선정일치(禪淨一致)를 낳았습니다. 신묘장구대다라니로 삼매의 힘을 쌓은 뒤 참선수행으로 나아갔고, 나무아미타불 염불로 삼매를 얻은 뒤 참선공부에 매진하였습니다.
밀교와 참선을 병행하였고, 염불과 참선을 함께 하는 불교가 되었습니다.
서로 전혀 갈등하는 일 없이 조화롭게 닦아가는 것이 한국불교의 특징입니다.
이것은 원효대사의 회통불교의 전통을 따랐기 때문입니다.
16. 신묘한 말씀의 다라니, 신묘장구 대다라니를 많이 하십시오. 관세음보살님의 비밀스런 가르침을 터득하고자 한다면 신묘장구대다라니를 풀어야 할 것입니다.
이 대다라니의 비밀을 푸는 열쇠는 오직 염송하는 이의 삼매에 달려 있습니다.
17. 수시로 하는 것도 좋지만 정해진 시간에 집중적으로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신묘장구대다라니로 행복한 삼매의 순간을 이루십시오. 그러면 관세음보살님의 진신을 보게 될 것입니다. 관세음 보살을 만나는 순간 당신이 원하는 모든 것은 해결됩니다.
1. 한 단어 또는 한 문장으로 된 주문을 만트라(眞言 또는 呪)라고 하고, 한 문단 이상으로 된 주문을 다라니(總持)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보통 만트라와 다라니를 통들어 주(呪) 또는 주문(呪文)이라고 일컫습니다. 한국 불교 나아가 대승불교권에서는 다라니 수행을 흔하게 볼 수 있고 모든 불교의식에서 빠질 수 없는 내용입니다.
2. 다라니(만트라)는 원래 인도말입니다. 인도의 고대사상의 근원이랄 수 있는 베다와 우파니샤드의 문헌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신의 언어로 알려져 해석하지 않고 입으로 암송하여 삼매에 들어가는 방편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신의 언어를 이용해야만 소통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다라니를 아는 것과 다라니에 대해 아는 것은 큰 차이가 있습니다. 다라니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있는 것과 다라니의 진의을 파악하는 것은 다르기 때문입니다.
다라니를 암송해야 하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다라니에 대한 연구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다라니를 통해 삼매와 해탈을 얻는 게 중요한 것입니다. 그렇다고 다라니가 아무 의미가 없거나 해석이 불가능한 것은 아닙니다. 다라니만이 신과 소통할 수 있는 유일한 언어라는 점입니다.
3. 불교에서도 이런 전통을 이어받아 우리의 근원자리인 법성(法性) 즉, 법신불, 자성불, 본성, 불성과 일치하는 수단으로 다라니 수행을 권해왔습니다. 특히 대승불교에서 유행하였고 티벳불교에서는 거의 다라니불교라고 할 정도로 발전해 왔습니다.
티벳불교는 무드라(신체적 훈련), 만트라(언어를 통한 훈련), 탄트라(의식을 통한 훈련) 세가지를 내세워 수행시키고 있습니다. 이 가운데 만트라는 입을 통한 비밀수행법입니다. 주로 만트라와 다라니를 암송하여 악업을 맑히게 합니다.
4. 불교에는 현교顯敎(붓다의 가르침을 해석할 수 있는 것)와 밀교蜜敎(가르침을 해석할 수 없는 것)가 있습니다. 현교는 보통 우리가 아는 경전의 가르침입니다.
분석과 이치를 파악하여 붓다의 지혜를 터득하게 하는 가르침입니다. 대개의 경전들이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로 옮겨져 있는 것은 현교이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밀교는 오직 경험과 깨달음으로만 확인할 수 있는 것이라 해석하지 않습니다.
깨달음에 이르는 방편으로 사용하는 것을 목적으로 합니다. 분석과 이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삼매에 드는 것을 강조하기 때문입니다. 하기에 밀교에서는 의미와 분석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오직 수행의 수단으로 사용할 뿐입니다. 그렇다고 밀교의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다라니에는 다라니 특유의 의미가 담겨져 있고 불교의 핵심이 담겨져 있다고 합니다. 그것은 오직 삼매에 들어갔을 때만이 터득할 수 있는 내용입니다. 해석보다도 실천을 강조하는 다라니 수행은 어쩌면 더 불교적일 수 있습니다.
5. 불교는 원래 밀교라는 것이 없었습니다. 붓다께서 <열반경>에 설하셨듯이, 손 안에 감춰진 가르침을 없었습니다. 자신을 등불(섬)로 삼고 법을 등불(섬)로 삼으라는 말씀은 바로 이런 이유에서 였습니다. 자기자신의 의식활동을 관찰하는 것이 불교수행의 근본이고 핵심이었습니다. 즉 자신을 등불로 삼는 길의 번째는 자신의 몸과 느낌과 마음과 의식작용을 세밀히 알아차리는 공부입니다.
이것 이외의 가르침은 곁가지에 지나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6. 그러나 대승불교시대가 되면서 붓다의 비밀스런 가르침이 존재한다고 주장하게 됩니다. 특히 밀교권(티벳, 몽고, 중국)에서 그랬고, 참선을 내세우는 선종(중국, 한국, 일본)에서도 그랫습니다. 범부중생들이 사용하는 언어로는 담을 수 없는 진리가 있다는 것입니다. 다라니는 오직 스승으로부터 전해받아 수행하는 것으로 비밀스럽게 이루졌습니다. 스승과 제자만이 통할 수 있는 코드이기 때문입니다.
7. 불교의 정수를 알기 위해서는 이 코드를 해결하지 않고는 불가능하였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밀교에서는 스승(구루)의 역할과 지위를 중시했던 것입니다. 또한 선종에서도 언어도단(言語道斷) 불입문자(不立文字)를 내세워 이심전심(以心傳心)을 강조하였습니다. 경전 밖의 가르침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오직 깨달음을 통해서만이 검증되는 것으로 견성성불을 강조하였습니다.
밀교에서는 스승이 제자에게 비밀스런 다라니를 전해주었고, 선종에서는 화두를 던져주었습니다. 다라니나 화두를 깨치게 되면 제자는 스승과 아무 걸림이 없이 통하게 되고 스승이 사용하는 모든 어휘와 단어를 이해하게 됩니다. 오직 그들만이 이해 할 수 있는 코드라는 것입니다.
8. 그러면 우리가 알고 있는 다라니와 화두는 무엇일까요? 이것은 밀교(蜜敎)나 선종(禪宗)에서 공개한 다라니입니다. 스승이 제자에게 직접 건네준 비밀스런 다라니 또는 화두가 아니라 누군든지 수지하여 사용할 수 있는 오픈소스입니다. 현재 우리들이 알고 있고 사용하고 있는 다라니가 바로 그것들입니다. 비밀스럽게 전해지던 방식에서 다시 불교적 전통으로 돌아와 공개된 것입니다. 허나 공개된 다라니라 하더
라도 해석보다는 암송하는 목적은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9. 공개된 다라니는 주로 경전에서 나온 것들입니다. 대승의 모든 경전들이 중간이나 결말에 다라니를 곁들이고 있습니다. 팔만대장경을 모아놓은 대장경(고려대장경, 신수대장경, 불광대장경, 등)을 들춰보면 쉽게 알 수 있습니다. 반야심경을 보더라도 '아제 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 사바하'가 끝에 나옵니다. 법화경, 원각경, 화엄경을 보더라도 다라니는 수없이 등장합니다. 티벳불교의 경전들이 아니더라도 쉽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즉 다라니는 인간의 언어로 붓다의 말씀을 옮겨놓는 것으로는 부족해 신비의 언어 그대로 옮겨 놓은 것입니다.
10. 공개된 다라니는 해석하지 않는 것이 상례이지만 해석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인도말인 산스크릿트로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해석된 다라니를 살펴보면 대개 경전의 내용을 함축한 것이거나 기도, 발원, 찬탄, 회향의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11. 한 마디로 우리가 알고 있는 다라니는 붓다의 가르침이거나 보살님들의 가르침입니다. 다라니의 목적이 삼매에 이르는 것이므로 힘들여 해석할 필요없이 암송할 뿐입니다. 다라니는 신의 음성에 어울리도록 이루어졌으므로 소리의 법칙에 적절하게 이루어져 있습니다. 리듬과 소리의 조화가 원만하게 갖춰져 있습니다.
본래 소리는 '공'의 상징입니다. 소리의 생성과 소멸은 공의 이치를 깨치게 하는데 큰 영감을 줍니다. 다라니가 입밖으로 나오는 순간 사라지게 됩니다. 다라니를 암송하면서 공의 이치를 터득하게 되고 소리와 소리가 끊임없이 이어지는 연기의 법칙을 깨닫게 됩니다.
12. 소리 그 자체가 다라니의 생명입니다. 소리가 흐르는 방향을 잡기만 하면 다라니 수행은 한 단계 접어들었다고 할 수 잇습니다. 마치 출렁이는 강물에 뗏목을 띠워 올라타는 것과 같습니다. 뗏목에 오르기만 하면 강물의 흐름과 거슬리지 않고 자유를 만끽하며 저편 언덕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다라니라는 뗏목을 올라타면 인생의 강줄기를 무난하게 건널 수 있다는 신념으로 암송해야 합니다. 다라니 암송의 소리와 하나되어 나와 남이 무너지고 부처와 중생의 경계가 사라진 자리에 들어가야 합니다.
13. 다라니는 중생과 부처, 번뇌와 보리라는 양단의 경계를 이어주는 다리입니다.
다라니를 염송하는 순간 우리들 마음은 부처와 중생의 경계가 사라지는 불이(不二)가 됩니다. 둘이면서 하나가 되는 통일의 장을 만들어 주는 것이 다라니입니다.
그래서 다라니는 신비를 체득하게 하는 힘이고, 지혜를 갖게 하는 묘력이며, 견줄수 없는 능력을 가져다 주는 양약입니다.
14. 어떤 다라니라 하더라도 상관 없습니다. 일단 자신의 마음에 영접했다면 기쁜 마음과 흔들림없는 마음으로 저어가야 합니다. 소리 소리마다 모든 부처님과 보살님들의 찬탄을 들으며 함께 가야 합니다. 한번 삼매의 맛에 길들이면 그때가 지고지순의 기쁨입니다. 그 이상 이하의 행복은 없습니다. 가장 귀한 기쁨을 얻는 행복의 비밀은 바로 다라니 삼매를 체험하는 일입니다.
15. 다라니, 다라니, 다-라니 많이 하십시오.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가장 쉬운 방법으로 가장 큰 힘을 얻을 수 있는 수행법입니다. 우리나라는 신라시대때부터 명랑법사가 유행시켜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특히 천수경에 나오는 신묘장구 대다라니는 한국불교의 대표적인 다라니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관세음보살께서 세상에 공개한 다라니들이 천수경과 기타 경전에 많이 나와 있습니다. 그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 신묘장구대다라니와 육자진언입니다.
16. 한국불교를 참선, 밀교, 정토 이렇게 세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잇습니다. 이 세가지는 하나로 통합되어 한국불교 특색으로 자리잡았습니다. 참선과 밀교가 통합하여 선밀일치(禪蜜一致)를 주장하였고, 참선과 정토가 통합하여 선정일치(禪淨一致)를 낳았습니다. 신묘장구대다라니로 삼매의 힘을 쌓은 뒤 참선수행으로 나아갔고, 나무아미타불 염불로 삼매를 얻은 뒤 참선공부에 매진하였습니다.
밀교와 참선을 병행하였고, 염불과 참선을 함께 하는 불교가 되었습니다.
서로 전혀 갈등하는 일 없이 조화롭게 닦아가는 것이 한국불교의 특징입니다.
이것은 원효대사의 회통불교의 전통을 따랐기 때문입니다.
16. 신묘한 말씀의 다라니, 신묘장구 대다라니를 많이 하십시오. 관세음보살님의 비밀스런 가르침을 터득하고자 한다면 신묘장구대다라니를 풀어야 할 것입니다.
이 대다라니의 비밀을 푸는 열쇠는 오직 염송하는 이의 삼매에 달려 있습니다.
17. 수시로 하는 것도 좋지만 정해진 시간에 집중적으로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신묘장구대다라니로 행복한 삼매의 순간을 이루십시오. 그러면 관세음보살님의 진신을 보게 될 것입니다. 관세음 보살을 만나는 순간 당신이 원하는 모든 것은 해결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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