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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전의 결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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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불교대학 작성일11-05-22 14:12 조회3,260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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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집(結集)이란 말은 합송(合誦)의 의미를 지닌 Sankiti의 한역이다.
 불교 역사상 4회의 결집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물론 이에 대해서 학자에 따라 다른 견해를 제기하기도 한다.

제1결집

 붓다의 장례가 일단락되었을 무렵에 마하카사파가 제자들과 상의해서 법(法)과 율(律)을 정리하고 확인하는 작업을 하였다.
 5백 명의 비구가 이를 위하여 왕사성(王舍城)의 칠엽굴(七葉窟)에 모였을 때 교법에 대해서는 아난다(Ananda)가 기억을 더듬어 가며 붓다가 설한대로 낭독했다.
 아난다는 붓다의 시자(侍者)로서 오랫동안 붓다 곁에서 설법을 들은 사람이다.
 그는 󰡒나는 이와 같이 들었나니(如是我聞)󰡓라는 말을 서두로 낭독했다고 한다.
 참가한 사람들은 이렇게 제출된 교법을 정정하여 확인한 후 모두 함께 합송했다.
 율(律)의 결집도 마찬가지 과정으로 이루어졌다.
 율은 우팔리(Upali)가 암송해 낸 것을 참가자 전원이 합송했다.
 이것은 곧 교법과 율의 편찬 및 확인으로서 앞에서 이야기했던 결집인 것이다.

 불교 역사상 최초로 행해진 이 제1결집에서 어떠한 교법이 결집되었는가 하는 문제는 여러 문헌에서 일치하지 않기 때문에 확실히 알 수 없다.
 그러나 후에 구분경(九分經)이나 오부(五部)로 경전이 정리되어가는 과정이었을 것이다.

제2결집

 교법(敎法)에 관한 한 비구들은 제1차 결집 때의 결과에 의존하면서 스스로의 수행에 의한 종교적 경지의 깊이와 붓다의 가르침에 대한 이해에 근거하여 법을 가르치고 전해나갔다.
 따라서 붓다의 유계(遺戒)였던 󰡐자등명 법등명(自燈明 法燈明)󰡑의 전통은 끊이지 않고 이어져 나갔다.

 생활 행위의 규범 즉 율(律)에 있어서 교법과 마찬가지로 그 기본을 충실히 지키면서도 각 지방과 각 시대의 형편에 따라 조금씩 수정을 가하고 있었다.
 따라서 표면에 나타나는 비구의 생활에 관해서는 각자의 상황에 따른 차이가 발생하는 것도 당연히 예상될 수 있는 일이다.
 이러한 이유로 붓다가 입멸한 지100년 경에 문제가 발생하게 된다.

 율에 철저한 야사(Yasa)라는 비구는 동인도의 바이샬리(Vesali) 거리에서 비구들이 신자로부터 금은을 받아서 분배하고 있는 광경을 보았다.
 그에게도 분배를 받으라고 권유했지만 그는 이것을 불법(不法)이라고 비난했다.
 바이샬리의 비구들은 승가(僧伽)의 결정에 따르지 않는 것이 무엄한 행위라고 하여 오히려 야사를 힐난했다고 한다.

 야사는 중부 인도와 서인도의 유력한 비구들에게 이 사정을 호소했다.
 그리하여 바이샬리 거리에는 동인도와 서인도 등지로부터 700명의 비구들이 모여들어 율의 해석을 둘러싼 논쟁을 벌이고 경전을 편찬했던 것이다.
 학자들은 이를 제2차 결집이라고 한다.
 제2차 결집의 상세한 내용에 대해서는 불전에 따라 여러 자료에 차이점이 있지만 율의 해석을 둘러싼 대립으로 인해 논쟁이 일어난 사실은 분명하다.
 실제로 금은의 수수뿐만 아니라 동인도의 비구가 관행으로 행하던 행위 중에서 십사(十事)를 놓고 동서에서 선정되어 모인 장로들이 열띤 논의를 벌인 끝에 결국에는 이들을 모두 불법(不法)으로 단정했다.

 결국 동인도의 진보적인 비구들은 이들을 불법이라고 단정지은데 불만을 품게 되는데 이로부터 보수적인 상좌부(上座部)와 진보적인 대중부(大衆部)가 분열하게 된다.

 *십사(十事)란?

1. 뿔로 만든 용기에 소금을 넣어 갖고 있다가 음식물에 넣어 먹는 것이 합법인가.
2. 수행자는 정오를 넘으면 식사를 할 수 없다. 그런데 정오가 지나서 태양의 그림자가 손가락 두 마디만큼 지난 시각까지 식사 시간을 연장하는 것은 합법인가.
3. 한 번 탁발해서 충분한 식사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또 다시 마을에 들어가 식사대접을 받는 것은 합법인가.
4. 동일 지역내에서 포살을 따로 행하는 것은 합법인가.
5. 승가의 여러 사항을 결정하는데 우연히 비구 전원이 참석하지 않았을 때 참석한 성원만으로 먼저 결정을 한 다음에 나중에 온 비구에게는 사후 승낙을 구하는 것은 합법인가.
6. 붓다나 아사리가 관행으로 행하고 있던 것을 자기도 행하는 것은 합법인가.
7. 우유를 충분히 마시고서도 또 다시 마시는 것은 합법인가.
8. 수액을 발효시켜 아직 알코올 성분이 나오지 않은 음료를 마시는 것은 합법인가.
9. 테두리가 없는 헝겊을 좌구(坐具)로 쓰는 것은 합법인가.
10. 금이나 은을 신자로부터 받는 것은 합법인가.

제 3결집

 불교를 독실하게 믿게 된 아쇼카왕은 절과 탑을 많이 세우고 많은 승려를 공양함으로서 그 수가 증가하여 수도 파탈리푸트라(Pataliputra)의 계원사(鷄園寺)에는 6만 명의 승려들이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외도(外道)들이 승려고 가장하고 승려들 사이에 끼어들어 교단의 화합을 깨뜨려 왕은 그들을 정리하기 위해 당시의 고승인 목갈리풋타 티사(Moggaliputra-Tissa)에게 교설의 확정과 승가의 화합을 도모하도록 위촉하였다.
 이에 목갈리풋타는 왕명을 받들어 천 명의 승려를 선출하여 스스로 상수(上首)가 되어 결집을 행하였는데, 아쇼카왕 즉위 18년에 시작하여 9개월간 소요되었다고 한다.
 이 결집을 화씨성결집(華氏城結集), 또는 일천결집(一千結集)이라고 한다. 한편 그때까지 스승으로부터 제자에게로 약 200년동안 구전(口傳)되어 오던 경전은 이 제3회 결집 때에 비로소 문자화되었다고 전한다.
 1,2회 결집 때는 경(經)과 율(律)만 결집되었지만 이 때는 논(論)도 결집되었다고 한다.

제4결집

 인도를 통일한 쿠샤나 왕조의 호불왕인 카니시카(Kaniska)왕의 후원으로 이루어졌다.
 그는 경론의 교설이 같지 않음을 보고 협존자(脇尊者) 파르스바(Parsva)에게 문의한 결과 불교 교단 내에 여러 부파가 있고 각 부파마다 그 교의를 달리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파르스바와 상의하여 이설(異說)을 통일하고자 카슈미르의 환림사(環林寺)에서 결집을 행하였다.
 세우(世友)를 상수(上首)로 하여 경장(經藏)의 주석인 우파데샤(Upadesa) 십만송을 결집한 후 율장(律藏)의 주석인 비나야비바샤(Vinaya-vibhasa) 십만송과 논장(論藏)의 주석인 아비달마 비바샤(Abhidarma-vibhasa) 십만송을 완성했다.
 이 제4결집은 삼장(三藏)에 관한 결집이 아니라 주석에 관한 결집이었기 때문에 엄밀한 의미에서의 불설 편찬 범주에서 제외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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